AI가 좌뇌를 대신하는 시대, 우리가 키워야 할 뇌는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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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기업 강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AI가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체하는데 그럼 우린 이제
어떤 능력을 키워야 하나요?
질문이 나오자 강연장이
조용해졌습니다.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대부분이
사실은 같은 질문을 마음에 품고
계셨던 겁니다. 저는 그날 나름의
답을 몇 가지 드렸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그 질문이 제 마음속에
계속 남았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AI에게 능력을 빼앗겼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빼앗긴 그
능력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제대로 따져
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 답을
저는 뜻밖의 곳에서 찾았습니다. 자기
뇌가 무너지던 그 아침을 연구자의
눈으로 끝까지 관찰한 한 뇌과학자의
기록이었습니다. 오늘이 영상을 보시면
AI가 가져간 능력이 무엇이고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능력이 무엇인지
조금 더 또렷하게 정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핵심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AI가 좌뇌를 대신하는 시대 우리가
키워야 할 뇌는 따로 있습니다.
정리하는 능력은 이미 기계의
몫시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절반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오늘 그 절반의 세계를 함께 찾아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정리하는 능력과 알아차리는 능력.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AI가
가져간 것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처음부터 서로 다른 종류의
능력이었습니다.
AI 시대에 대체되지 않는 능력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아는 능력. 둘째, 내 감정에
휘들리지 않고 결정하는 능력. 셋째,
사람을 직접 마주하는 능력.이 이 세
가지를 먼저 머리에 담아 두시면 오늘
이야기가 훨씬 쉽게 이어질 것입니다.
그런데이 세 가지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요. 전부 정보를 다룬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계산하고 분석하고
정리하고 유약하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 내 앞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줄이면
이렇습니다. AI가 가져간 것은
정리하는 능력이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알아차린다라는
말이 조금 막연하게 들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이 말을 한번 뜯어
보겠습니다. 알아차리다는 알다와
차리다가 붙어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국어 사전에서 차리다를 보면 두 가지
뜻이 함께 나오는데요. 상을
차리다처럼 흩어져 있는 것을 제자리에
버려 놓는다는 뜻. 그리고 정신을
차리다처럼 흐트러진 것을 가다듬어
되찾는다는 뜻. 그러니까
알아차린다라는 건 없는 걸 새로
알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내
앞에 있었는데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을
제자리에 놓고 다시 보는 겁니다.
AI는 자료를 정리하고 사람은 자기
상태를 차립니다. 조금 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지적
능력 그 절반은 이미 AI에게
밀렸습니다. 계산, 분석, 정리,
요약. 우리가 오랫동안 똑똑함이라고
믿어온 그 능력들 말입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제 그건 우리보다 기계가 더
빠르고 더 정확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분들이 이렇게 반응하죠. 그럼
나도 더 논리적으로 더 빨리 개선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저는 그건
물고기와 해형 시합을 하겠다는 말과
같다고 보는데요. 물 속에서 물고기를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물 밖으로 나와야 하죠. 문제는 물
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우리가 잘
모른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물 밖으로 나가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AI는 인류가
만든 궁극의 좌뇌다. 여기 오늘
우리가 계속 함께할 뇌 과학자가
있습니다. 하버드에서 뇌를 연구하다가
37 뇌 졸증을 겪은 뒤 그 경험을
세 개에 알린 질볼트 테일러
박사입니다. 이분은 우리 뇌 안에
서로 다른네 명의 인격이 산다고
말합니다. 그중 자네에 사는 두
사람을 먼저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논리적이고 언어를 다루고 숫자를
계산하고 세상을 분류하는 인격입니다.
두 번째는 과거의 데이터와 규칙
그리고 어제 실수를 기억하는
인격입니다. 자, 여기서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논리, 언어
계산, 분류, 그리고 방대한 데이터.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그게
바로 AI가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AI는 말하자면 인류가 만들어낸
궁극의 좌형 인재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는 분명히 짓고 넘어가야
하는데요. 좌형 인간, 운회형
인간이라는 말을 겁니다. 그런데 이건
뇌과학에서 이미 상당 부분 정리된
통념입니다. 13년 미국 유타대학교
연구팀이 7세부터 29세까지
1011명의 뇌 영상을 분석해 학술지
플러스원에 밥한 연구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이랬습니다. 개인이 좌형이나
운형으로 편양되어 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테일러 박사가 얘기하는네 가지 인격도
해부학적인 뇌 지도라기보다는 우리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는네 가지 마음에
붙인 이름에 가깝다고 보시는게
정확합니다. 내 위치가 중요한게
아니라 우리 안에 정리하는 능력과
알아차리는 능력이 따로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AI가 가져간 쪽이
정리하는 능력이라는 것. 오늘 중요한
건 그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랫동안 정리하는 능력만을 인간의
왕관처럼 떠바들어 왔습니다. 약
400년 전 근대 철학에 문을 연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생각한다. 존재한다.
생각하는 능력 즉 이성이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든다고 믿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 왕관을 AI가 가져가
버렸습니다. 더 빠르게 더 지치지
않고 더 방대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이제
물어야 합니다. 정리하는 능력 넘어
우리가 오래 입고 살았던 나머지
절반은 대체 어떤 곳일까요? 뇌의
절반을 읽고 도착한 세계. 1996년
12월 10일 어느 겨울
아침이었습니다. 37살의 뇌과학자
질볼트 테일러는 자신의 내 안에서
혈관이 터지는 것을 느낍니다.
뇌졸증이었습니다. 그것도 하필 언어와
논리를 담당하는 좌회에서였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에 질렸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은
뇌가학자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좌과
하나씩 꺼져가는 그 과정을 연구자의
눈으로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말이
사라지고 숫자가 흩어지고 몸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나라는
감각이 흐려집니다. 여기서부터 나이고
저기서부터 세상이라는 그 분명하던
경계선이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연히 이렇게
예상합니다.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녀가 남긴 기록은 달랐습니다. 그
상실의 순간 테일러가 느낀 것은
공포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느낀
것은 완벽한 평화였다고 합니다.
광활라고 고요하고 벅창 감각.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껍데기가 사라지고
세상 모든 것과 하나로 연결되는
감각이었습니다. 정리하는 뇌가
조용해지자 비로소 다른 세계가 문을
연겁니다. 테일러가 말하는 나머지 두
인격이 사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세 번째 인격은 지금이 순간에
삽니다. 호기심 많고 장난스럽고
어제도 내일도 걱정하지 않는 아이
같은 존재입니다.네 번째 인격은
경외를 느낍니다. 나와 너, 나와
세계가 결국 이어져 있다는 큰 그림을
봅니다. 그리고 테일러는 그 자리에서
돌아와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세계는 신비한 어딘가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머릿속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테일러가 뇌가학의
언어로 다녀온이 세계는 사실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약
2,300년 전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과 장자가 쓴 책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데요. 한 제자가 스승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좌망하게
되었습니다. 스승이 묻습니다.
좌망이라니 그게 무엇이냐? 제자가
답합니다. 손발과 몸을 잇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치고 육체를 떠나고
앎을 버려 크게 트인 것과 하나가
됩니다. 이것을 좌망이라 합니다.
좌망은 앉을 좌 잊을 씁니다. 앉은
그 자리에서 있는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잊을까요? 몸의 경계를 있고
감각의 분별을 있고 내가 안다고
믿었던 것을 잊습니다. 그러니까
좌망은 정신을 잃는게 아니라 정리하는
뇌를 잠시 꺼두는 겁니다. 중요한 건
2300년 전에 이미 누군가가이
상태를 관찰했고 거기에 이름까지
붙여두었다는 사실입니다. 몸의 경계가
흐려지고 앎이 물러나고 자기와 세계가
이어지는 감각. 장자는 그걸
좌망이라고 불렀고 테일러는 자기 뇌
안에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했습니다. 한쪽은 오랜 수련으로
도달했고 다른 한쪽은 뇌의 절반을
잃고 도착했습니다. 물론이 둘이
정확히 같은 현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보는데요. 서로
만난 적 없던 두 사람이 같은 자리를
각자의 언어로 따로 기록해 둔 것에
가깝다고요. 그렇다면 왜 하필
알아차리는 능력이라고 하는 걸까요?
자, 이제 앞에서 드린 결론으로 다시
돌아가 보겠습니다. AI가 가져간
것은 정리하는 능력이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알아차리는 능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정리는 내 밖에 있는
것을 다루는 일입니다. 알아차림은 내
안에서 벌어지는 것을 다루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 벌어지는
일에는 AI가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경외감, 연결, 지금이
순간에 벅참 이건 정보가 아니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AI는
페피어의 모든 문장을 알고 있죠.
1초 만에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섹스피어를 읽으며 울지는
못합니다. 노를 계산할 수는 있어도
노에서 말문이 막히지는 못합니다.
데이터로 사랑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사랑에 빠져 밤을 지세우지는
못합니다. 이건 정보가 아니라 지금이
순간 살아 있는 존재에게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중요한 건
알아차리는 능력이 그저 낭만적인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주 실제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혹시 감정 90초의
법칙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테일러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감정이든 그것이 우리 몸에서 일으키는
화학 반응은 대략 90초면 지나간다고
말입니다. 분노도 불안도 생리적으로는
90초짜리 손님이라는 거죠. 그럼 왜
우리는 어떤 화를 사흘씩 어떤 상처를
3년씩 끌고 다니는 걸까요? 답은
이겁니다. 90초가 지난 뒤에도
우리가 그 일을 자꾸만 다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붙드는 마음이
계속 그 장면을 재생하면서 이미 꺼진
불에 스스로 기름을 붙는 겁니다. 약
2,년 전 노예 출신에서 현자가 된
고대 로마의 스토화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우리의 판단이다. 즉
90초의 법칙은 결국 스토와 철학이
오래 전에 알아낸 지혜를 내가 언어로
다시 말한 것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알게 됩니다.
알아차리는 능력은 감상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실제로 일어난
일이고 어디부터가 내가 덧붙인
해석인지를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그건
계산이 아니라 관찰입니다. 그리고이
관찰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가장 적게
훈련하고 있는 능력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이 능력의 가치가 오르는가?
여기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테일러 박사는 그
내절증에서 그냥 회복한게 아닙니다.
무려 8년에 걸쳐 무너진 뇌를 벽돌
하나하나 다시 쌓듯이 재건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알아차리는
능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건 훈련되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힘, 연결하는 힘, 지금이
순간에 머무는 힘. 우리가 근육을
키우듯이 힘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지금이 능력의
가치가 오르고 있을까요? 앞에서
말씀드린 세 가지를 하나씩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AI는 답을
독점했지만 질문을 독점하지
못했습니다. AI는 여전히 주어진
물음의 답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완전히 새로운 물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는 못하죠. 인류의 진보는 대부분
답이 아니라 질문에 시작됐습니다.
답이 흔해질수록 좋은 질문 하나의
값은 올라갑니다. 그리고 좋은 질문은
지식이 많아서 나오는게 아닙니다.
다들 당연하다고 넘어가는 자리에서
혼자 어 이거 이상한데 하고
알아차리는 데서 나옵니다. 즉 질문은
아는 능력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능력입니다. 둘째 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곧 판단력이 됩니다. AI가
정보를 아무리 잘 정리해 줘도 마지막
선택은 결국 사람이 합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대부분 감정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불안할 때 우리는
다르게 판단하고 화가 났을 때 우리는
다르게 결정합니다. 내 감정이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알아차리는 사람과
감정에 그대로 실려가는 사람의 판단은
같을 수 없습니다. AI가 판단의
재료를 다 준비해 주는 시대일수록
판단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더
중요해지는 거죠. 셋째, 마주함은
정리로 대체되지 않습니다. AI는
공감의 언어를 아주 잘 흉내내죠.
앞으로는 더 잘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흉내야 마주함은 다릅니다.
누군가의 얼굴 앞에서 말이 막혀 본
경험. 아무 결론도 없는 대화에
두시간 이상을 써 본 경험. 그
사람이 가진 것은 정보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효율의 관점에서 보면
낭비처럼 보이는 그 시간이 대체
불가능성에 가장 단단한 부분일 수
있는 것이죠. 정리함이 이렇습니다.
AI가 잘하는 것이 많아질수록 인간이
잘해야 하는 것은 줄어드는게 아니라
오히려 또렷해지는 겁니다. 더 빨리
정리하는 쪽이 아니라 더 먼저
알아차리는 쪽으로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오늘 정리만 하며
하루를 보냈는가? 아니면 단 한
번이라도 무언가를 알아차렸는가? 오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AI는
우리의 정리하는 능력을 가져갔습니다.
그건 우리가 오랫동안 똑똑함이라고
믿어왔던 능력의 절반이 기계의
몫시되었다는 뜻입니다. 뇌 과학자
질볼트 테일러는 자신의 뇌 절반을
잃고서야 나머지 절반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건 그
세계가 신비한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이미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남겼습니다. 그건 늦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도 아직 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 세계에서 나디은
이름들도 만났는데요. 장자의 좌망
그리고 에픽테토스의 판단. 그건
입문학이 약 2,년 넘게 지켜온
자리가 사실은 AI 시대의 가장
실용적인 자리였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AI 시대의 진짜
경쟁력은 더 많은 것을 아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지금 내 앞에서
그리고 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다음 영상에서는 AI 시대에 대체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지 더 깊은
이야기로 찾아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오늘도 입문 안에 한지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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